← 몰락한 문파의 마지막 제자청운산을 내려오는 길, 명우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가슴의 울렁거림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것을 관리할 수 있었다. 감정은 약점이 아니었다. 도구였다.
상자는 여전히 품속에서 무게를 전했다. 미완성 무공서와 일기장. 청운자의 흔적들.
명우는 한적한 산길의 바위에 몸을 기댔다.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주변을 확인했다.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산바람과 낙엽뿐.
그가 품에서 손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시스템."
공기가 한 번 떨렸다.
순간, 그의 시야 앞에 투명한 청남색 글자들이 떠올랐다. 마치 공중에 새겨진 것처럼. 명우의 눈이 그 글자들을 따라 움직였다.
┌─────────────────────────┐
│ [시스템 인터페이스 v0.7] │
│ 사용자: 서명우 │
│ 상태: 정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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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SIC STATUS 】
[힘 (STR)] ■■■■■■■■ 8/20
[민첩 (AGI)] ■■■■■■■ 7/20
[체력 (CON)] ■■■■■■ 6/20
[지능 (INT)] ■■■■■■■■■ 9/20
[정신력 (WIL)] ■■■■■■■■■■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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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의 눈이 각 항목을 하나씩 훑었다. 객관적인 수치들. 자신을 정량화한 결과들.
'힘이 약하다.'
그의 눈이 여섯 칸만 채워진 체력 항목에 머물렀다.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다는 뜻이었다. 3년. 3년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몰라도, 신체는 그 시간을 속이지 않았다.
명우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옅은 웃음.
'3년이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정신력 10. 그것이 명우를 지탱하고 있었다. 10 대 6. 그 비율이 자신의 현재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신체는 부서졌지만, 의지는 멀쩡했다. 아니, 이제는 더 견고했다.
지능 9는?
명우의 표정이 가늘어졌다. 나쁜 수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았다. 청운자는 지능이 어땠을까.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명우는 그것을 밀어냈다.
비교는 독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최적화였다.
그는 손가락을 모으며 생각했다.
'민첩이 낮다.'
7은 둔하다는 뜻이었다. 빠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저승사자들을 피했을 때를 떠올렸다. 운이 좋았다. 그것 뿐이었다. 다음 번에는 운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명우의 눈이 다시 정신력에 닿았다. 10/20. 이것이 명우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압박 속에서도 판단력을 잃지 않는 것.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는 것.
청운자의 일기장이 생각났다.
'명우가 너무 차갑지 않기를.'
스승의 말이었다. 스승은 자신의 제자를 따뜻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명우는 알고 있었다. 따뜻함은 죽음이었다. 청운파가 멸문된 이유 중 하나였다.
명우의 손이 상자를 다시 쓸어내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 살아야 한다.
그 약속이 있었다.
명우는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다시 호출했다.
"상세 분석."
인터페이스가 변했다. 더 복잡한 정보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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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ILL ANALYSIS 】
[무술 기초] ■■■■ 4/10
└─ 청운파 기초 검술 (미숙)
└─ 기초 체술 (미숙)
[시스템 상호작용] ■■■■■■■■ 8/10
└─ 인터페이스 해독 능력 (우수)
└─ 오류 감지 (우수)
[생존 기술] ■■■■■■■■■ 9/10
└─ 은폐 (우수)
└─ 추적 회피 (우수)
└─ 자원 관리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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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존 기술이 9라고?'
그것은 자신이 살아남은 3년을 반영한 결과였다. 시스템이 자신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시스템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술 기초는 4였다. 미숙이었다.
"운로십팔식을 수련하면 이게 올라가겠지."
명우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깊은 정보를 원했다.
"운로십팔식. 시스템 스캔."
인터페이스가 또 변했다. 이번에는 오류 메시지가 떴다.
┌─────────────────────────┐
│ [스캔 실패] │
│ 대상: 불완전한 정보 구조 │
│ 진행률: 33.3% │
│ 상태: 데이터 손상 │
└─────────────────────────┘
"역시."
명우가 웃음을 흘렸다. 미완성이었다. 당연했다. 청운자가 완성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명우의 눈빛이 변했다. 차갑게. 예리하게.
"시스템. 나머지 두 식의 정보가 있는가?"
인터페이스가 떨렸다. 마치 고민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후, 글자가 나타났다.
┌─────────────────────────┐
│ [쿼리 처리 중...] │
│ [대상 검색...] │
│ [결과: 찾을 수 없음] │
│ │
│ 추가 정보: │
│ - 데이터 소실 구간 존재 │
│ - 접근 제한됨 │
└─────────────────────────┘
명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접근 제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겨놨다는 뜻이었다. 또는 시스템 자체가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명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분노는 아니었다. 호기심이었다. 호기심과 계산이 섞여 있었다.
'누가? 왜?'
저승사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명우를 죽이려고 했다. 또는 명우를 데려가려고 했다.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가정을 세워야 했다.
명우의 손이 상자에 닿았다. 미완성 무공서. 청운자의 흔적.
'스승. 당신은 뭘 알고 있었어?'
일기장의 글귀들이 떠올랐다. 스승의 필체. 스승의 걱정. 스승의 사랑.
명우의 정신력이 10이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시스템에 명령했다.
"모든 인터페이스 종료. 백그라운드 모니터링만 유지."
인터페이스가 사라졌다. 공기가 다시 맑아졌다.
명우는 일어섰다. 상자를 품에 안았다. 산길의 바위에서 내려왔다. 햇빛이 차가웠고, 하늘은 여전히 흐려 있었다.
하지만 명우의 눈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약속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직 명우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였다.
산길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명우는 청운산의 자락을 벗어나면서 공기의 습도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높이가 낮아질수록 산의 그림자가 걷혔고, 햇빛은 더욱 차갑게 피부를 찔렀다. 상자를 품에 안은 채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균형을 잡아야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자를 고정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향이 이상하다.'
명우는 발을 멈췄다. 생존 기술(9/10)이 울렸다.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냄새—육식동물의 냄새, 축축한 털, 그리고 오래된 피의 냄새가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바람 방향으로 계산하면, 약 150미터 앞쪽이었다.
명우는 천천히 움직였다. 발걸음을 가볍게, 호흡을 얕게. 시스템 인터페이스는 종료했지만, 몸이 기억하는 것들은 남아 있었다. 3년의 공백. 그 사이 명우의 신체가 무엇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만큼은 예리했다.
산길이 급격히 좁혀졌다.
양쪽으로 잡목과 덤불이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지나간 짐승의 흔적이 선명했다. 발굽 자국이 아니었다. 발톱 자국이었다. 깊고, 날카로웠다.
명우가 한 발을 더 내디디는 순간, 세상이 정지했다.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잡목 사이의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었고, 명우가 50미터까지 가까워지자 움직였다.
회색 늑대였다.
몸집은 일반적인 늑대보다 컸다. 어깨높이가 1.5미터는 넘어 보였고, 등의 털은 강철색으로 빛났다. 눈은 검은 것이 아니라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입가에서 떨어지는 침은 지면을 태웠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명우는 그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세계관의 틈이 벌어지는 느낌. 그 짐승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생물도 아니었다.
'몬스터.'
단어가 명우의 뇌에 꽂혔다. 어디서 나온 단어인가? 3년의 공백에서? 시스템의 종료된 데이터베이스에서?
늑대가 울었다.
소리는 울음이 아니었다. 기계음처럼 들렸다. 무언가를 공중에 긋는 듯한, 금속성의 비명이었다. 명우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정신력이 높다는 것도, 생존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도—이 순간에는 무의미해 보였다.
그 짐승의 다리 근육이 수축했다.
명우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굴렸다. 상자를 품에서 떼어내고, 그 자리에 던져 버렸다. 회색 늑대가 날아왔다. 명우가 있던 자리를 가로질러 통과했고, 그 궤적 위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실제로 일그러졌다. 시각적 왜곡이 아니라 물질적 일그러짐.
명우가 구르며 일어났다. 상자는 5미터 뒤에 있었다. 늑대는 이미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턱은 명우를 향해 열렸고, 내부의 이빨은 수십 개였다. 아니, 수백 개였다. 이빨이 이빨 위에 겹겹이 자라 있었다.
'안 된다.'
명우는 한 발을 내디뎠다가 멈췄다. 거리 계산. 속도 계산. 반응 시간 계산.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그의 현재 능력치는 전투를 상정하지 않았다. 정신력 10과 생존 기술 9. 둘 다 피하고, 숨고, 버티는 능력이었지, 싸우는 능력이 아니었다. 신체 능력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아마 형편없을 것이었다.
늑대가 다시 뛰었다.
명우는 손을 들었다. 방어 자세가 아니었다. 항복 제스처였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상자가 날아왔다.
명우의 품에서 던져진 상자가 늑대의 궤적과 교차했다. 늑대가 상자를 집어삼켰다. 상자는 그 이빨 사이에서 으깨졌다. 목재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명우의 정신이 한순간 공백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스승의 유품이—'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늑대가 상자를 삼킨 채로 방향을 다시 바꿨다. 그 눈은 여전히 명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분노로 보였다. 마치 자신의 먹이를 빼앗긴 듯한 분노였다.
명우는 뒤돌아 뛰었다.
계산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움직였다.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청운산 쪽으로. 다시 높이로. 그 짐승이 더 약할 곳으로.
뒤에서 늑대의 발소리가 울렸다. 흙을 파고, 바위를 부수며 따라왔다. 명우는 절벽 가까이로 몰렸다. 왼쪽은 낭떠러지였고, 오른쪽은 잡목이었다. 앞쪽은 더 가팔라진 산길이었다.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명우의 호흡이 끊어졌다. 정신력이 높다는 것도, 생존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도, 이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도망'을 위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때였다.
'시스템. 활성화.'
명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뇌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절박함이 만든 신호였다.
세계가 끊겼다.
파란 인터페이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중앙에, 명우는 처음으로 보는 정보를 마주했다.
[긴급 상황 감지]
[생존 확률: 12%]
[권장 행동: 회피 불가능]
[권장 행동: 항복 불가능]
[권장 행동: ...]
마지막 항목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접근 불가능했다.
명우의 눈이 떨렸다.
회색 늑대가 마지막 도약을 준비했다. 그 입이 더욱 벌어졌고, 내부의 이빨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명우는 후퇴했다. 한 발, 또 한 발. 절벽의 가장자리로.
발 아래는 공허였다.
명우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3년이. 뭔가를 빼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