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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소환됐는데 직업이 상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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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환된 자 의식이 돌아오는 과정은 물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먼저 소리가 들렸다. 아니, 진동이었다. 낮은 음역대의 윙윙거림이 김준호의 온몸을 울렸다. 그 다음 냄새. 향초와 말린 풀의 톡 쏘는 향기, 그리고 무언가 타는 냄새. 마지막으로 눈이 떠졌다. 어둠이 먼저 보였다. 그 다음 불빛. 김준호는 깜빡이는 촛불을 응시했다. 천장 높이에 몇십 개, 아니 몇백 개의 촛불이 매달려 있었다.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며. 마치 도서관의 그 원진처럼. '아, 깼다.' 목이 바싹 말랐다. 혀가 붕어빵처럼 딱딱했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차갑고 무거웠다. 그 순간 목소리들이 들렸다. "깨어나셨다!" "용사님! 드디어!" "신께 감사합니다. 마침내..." 음성이 여럿이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은 목소리들이 겹쳐 울렸다. 김준호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인물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촛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숭배의 빛이 담긴 눈들. '뭐... 뭐지?' 김준호는 침을 삼켰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조차 누군가 주목했다. "움직이신다! 몸이 아직 미로스 마나에 적응 중이십니다. 잠시만요." 가장 가까이 있던 인물이 앞으로 나왔다. 목소리는 여성이었다. 낮고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굳은 결연함이 있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움직였다. 몸짓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따뜻한 기운이 김준호의 팔다리로 흘러들었다. 근육이 풀렸다. 혈액이 다시 순환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김준호는 팔꿈치로 몸을 밀어올렸다. 움직임이 어색했다. 마치 남의 몸을 빌려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적응했다. 그렇게 일어난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거대한 원형의 홀이었다. 천장은 높고, 벽은 검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 벽마다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책의 페이지가 벽에 투영된 것처럼. 원의 중심에 있는 것은 대리석 원진이었다. 정확히는 여러 겹의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 기호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그 원진과 같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용사여." 김준호의 눈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로브 안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회색 눈. 날카로운 광대뼈. 입가에 엷은 미소.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삼십 대로 보일 수도, 오십 대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명확했다. 이 여성은 이곳의 통솔자였다. "루시아라고 합니다. 이 왕국의 대마법사입니다." 루시아는 느릿느릿 원진을 따라 걸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마치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당신은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입니다. 용사여. 우리의 신성한 소환식을 통해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불려오신 분입니다." '소환식?' 김준호의 뇌가 돌아갔다. 도서관. 책. 원진. 그리고... "당신은 어디서 오셨나요?" 루시아가 멈춰섰다. 그녀의 눈이 김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호기심 섞인 의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김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서울? 도서관? 경영학 기말과제? 그게 설명이 될까? "다른 차원의 서울이군요. 이해합니다."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그 신호에 다른 마법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같은 동작으로. "이제 당신의 정체를 확인해야 합니다, 용사여." "정체를?" "그렇습니다. 소환식의 기록에 따르면, 당신은 여러 직업을 가질 자입니다. 검사일 수도, 궁수일 수도, 마법사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상인일 수도 있습니다." 루시아가 다시 걸어왔다. 그 뒤를 따라 다른 마법사들도 일어났다. 그들은 원진의 외부로 물러났다. 마치 무대 배우처럼. "당신의 첫 번째 시험입니다." 루시아가 손을 펴 보였다. 그 손바닥 위에 세 개의 물체가 떠 있었다. 첫 번째는 검이었다. 작은 검이었지만, 그 윤기는 진짜였다. 두 번째는 책이었다. 두꺼운 책. 마치 마법서처럼 보였다. 세 번째는 동전이었다. 금화처럼 보이는 것이 다섯 개 정도.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검은 전사의 길이고, 책은 마법사의 길이며, 금은 상인의 길입니다." 김준호는 루시아의 손을 바라봤다. 떠 있는 물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본 그 거대한 렌즈를 떠올렸다.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들. 그리고 책의 페이지에 적힌 글씨. —1단계: 당신의 정체를 확인하시오. '아.' 김준호가 깨달았다. 이것도 게임이었다. 다만 다른 규칙을 가진 게임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몸의 감각이 이제 명확해졌다. 그는 루시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만 선택해야 하나요?" 루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놀라움과 의심이 교차했다. "그렇다고 했습니다만..." "그럼 전부 가져도 되나요?" 침묵이 흘렀다. 원형의 홀 안에서 촛불만이 타닥타닥 울었다. 루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형성되었다. "흥미롭군요, 용사여." 그녀가 손을 움직였다. 세 물체가 김준호의 앞에 떨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잡았다. 검과 책과 금화를. "당신은 단순한 전사도, 마법사도, 상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루시아가 걸어갔다. 다른 마법사들이 그녀를 따랐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김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린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로 뭔가 적혀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읽으려 하자 자동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당신의 스킬 북입니다. —현재 스킬: 없음. —당신의 게임은 계속됩니다. 김준호는 웃음을 참았다. 이 왕국의 마법사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용사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책의 목소리는 이미 선언했다. 당신은 깨어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게임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정체를..." 루시아가 돌아섰다. 그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처럼. "나중에 알아보겠습니다." 김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게임 규칙의 일부를 이해한 자의 자신감이었다. 원진이 다시 빛났다.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루시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울 같은 벽으로 둘러싸인 방으로 옮겨진 것은 밤이 깊었을 무렵이었다. "기초 검술을 먼저 배우겠습니다."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눈빛은 다르게 보였다. 탐색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원형 홀에서의 그 순간 이후로, 그녀는 김준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검은 로브를 벗은 마법사 셋이 대련장의 모서리에 섰다. 관찰자들이었다. 검은 손잡이의 검이 김준호에게 던져졌다. 가볍지만 단단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현실적인 감촉이었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한 순간 그는 이게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기본 자세부터." 루시아가 검을 들었다. 움직임이 우아했다. 마법사라는 직업이 칼을 다루는 것이 어색해 보일 법했지만, 그녀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검의 무게를 완벽히 이해한 몸이었다. 김준호가 흉내 내듯 자세를 취했다. 첫 번째 공격은 경고처럼 느린 속도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금속음이 울렸다. 팔에 전해지는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루시아의 손목에서 나오는 힘이 그리 크지 않아 보였는데도, 그의 팔은 떨렸다. '약하네.' 그 생각이 뇌를 스쳤다. 동시에 무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다시." 루시아가 검을 거두었다. 아주 짧은 휴식. 그리고 다시. 이번엔 조금 더 빨랐다. 김준호의 반응이 늦었다. 검이 옆구리를 맞췄다. 진짜로 맞췄다. 로브를 입고 있었기에 피부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은 분명했다. 몸이 한 발 뒤로 밀렸다. "집중하세요." 루시아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 열 번을 더 맞았다. 어깨, 팔, 다리, 등. 루시아는 치명적인 부위는 피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했다. 그것이 검술의 기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김준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숨이 차올랐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이 떨렸다. '이게... 이게 뭐지?' 게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어딘가 설레는 감각이 있었다. 책이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부를 때는 우월감 같은 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깨달았다. 게임은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게임은 시스템이었고, 시스템은 규칙이었고, 규칙은 절대였다. 그리고 그는 약했다. "일어나세요." 루시아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단지 명령했을 뿐이다. 김준호가 바닥에서 손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용사는..." 루시아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검을 아래로 향했다. "약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눈이 정확히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의심이 아니라면 뭘까. 경계? 아니면— "당신은 지금 약해 보입니다." 루시아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용사는 태어날 때부터 강합니다.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들은 이 세계에 와서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것이 선택받은 자들의 특징이죠." 그녀가 검을 들어올렸다. "당신은 다르게 보입니다." '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김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적인 부분과 감정적인 부분이 충돌했다. 이성은 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용사가 아니라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거짓을 덧칠할까, 아니면— "약함도 게임의 일부입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왔을 때, 김준호 자신도 놀랐다. 루시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게임은 처음부터 강한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게임은 약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게임의 방식입니다." 그는 루시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용사든 뭐든, 지금 이 순간 저는 약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의 규칙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규칙을 이해하는 자입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정확한 진실이었다. 루시아가 검을 내렸다. "흥미롭네요." 그녀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떴다. "진짜 용사라면 이런 합리화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강했을 테니까요. 당신은... 약함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녀가 한 발 물러섰다. "약함을 받아들이는 자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을 잃을 수도 있어요." 루시아의 눈이 다시 한 번 원진을 향했다. 벽 위의 거울에 비친 원진. 거기엔 여전히 희미한 빛이 남아 있었다. "당신의 게임을 계속해보세요, 용사. 아니면... 용사가 아닌 분." 그녀가 돌아섰다. "내일 밤 다시 만날 겁니다. 그때까지 자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마법사들이 따라나갔다. 마지막에 루시아가 문간에서 멈추고 뒤를 봤다. "그리고 김준호. 게임이라는 단어를 쓸 때의 그 자신감은... 좋았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게임에 속한 자들은 게임을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런 자라면... 이 왕국은 조금 복잡해질 것 같네요." 문이 닫혔다. 김준호는 거울 같은 벽 앞에 홀로 남겨졌다. 그의 모습이 무한히 반복되어 보였다. 약해 보이는 모습이. 떨리는 손을 가진 모습이. 하지만 그 눈빛은— 그 눈빛만은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 스킬 북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게임의 플레이어로 만들어놨다면, 게임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게임에서는 항상 방법이 있다. 룰을 찾으면 된다. 원진이 한 번 더 빛났다. 아주 희미하게. 마치 누군가 그의 선택을 인정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