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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아버지로 빙의했습니다

3

밤 12시 정각. 박준호의 꿈은 검은색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검은색.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이 없는, 음성도 반사되지 않는 그런 어둠 속에서 그는 걷고 있었다. 발이 뭔가를 밟았다. 딱딱. 골짜기를 굴러내리는 자갈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박준호는 손을 내밀었다. 차갑고 질척한 무언가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모래? 흙? 아니다. 뭔가 더 이상한 것. "아빠." 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옆에는 없었다. 위에서? 아래에서? 사방에서 울려오는 목소리. "아빠, 깨." 박준호가 눈을 떴다. 세상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그게 아니었다. 흔들림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침실 전체가 진동했다. 저음의 울림이 가구를 타고 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침대 프레임이 바닥을 두드렸다. 벽장의 문이 덜그럭거렸다. 박준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시우가 침대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아빠!" 지진. 아니 뭔가 다른 거였다. 박준호는 그걸 알았다. 몸이 기억했다. 미래에서 겪었던 그 감각. 시스템이 내려올 때의 그 울림. 천장의 초록 별 스티커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준호는 시우를 침대에서 낚아챘다. 아이는 가볍다. 너무 가볍다. 마치 안고 있는 게 실제 아이가 아닌, 아이의 잔상 같은 가벼움. "괜찮아. 괜찮아." 박준호가 중얼거렸다.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울림이 점점 강해졌다. 저음이 아니었다. 그건 높은 음역대의 울림과 섞여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주파수가 겹쳐지는 것처럼. 불협화음. 귓가에 거슬리는 진동. 시우가 박준호의 목을 감쌌다. "뭐야? 뭐 하는 거야?" "모르겠다. 그냥 잠깐만." 박준호는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도 흔들리고 있었다. TV가 화면을 깜빡였다. 잠깐 전원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그 사이에 무언가가 스친다. 코드? 신호?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 그런 깜빡임. 거실의 천장 전체가 밝아졌다. 흰색이 아니라 은색. 마치 수은처럼 흐르는 은색 빛. 그 빛이 천장을 타고 벽을 타고 내려왔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하지만 물처럼 떨어지지는 않았다. 공중에서 멈춰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박준호의 팔에서 소름이 돋았다. "아빠..." 시우가 속삭였다. 그 순간이었다. 울림이 정점에 달했다. 박준호의 귀가 울렸다. 시각이 순간 하얘졌다. 마치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깊은 것. 뇌에 직접 박히는 그런 울림. 그리고 목소리. "[━━━━━━━━━━━━━━━━]" 숨소리가 아니었다.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박준호의 뇌가 그걸 해석하려 애썼다. 마치 자동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START] 그 단어가 떠올랐다. [SYSTEM INITIALIZE] 거실의 은색 빛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그리고 터졌다. 빛이 아니라 무언가 더 본질적인 것. 규칙. 법칙. 세상을 다시 정의하는 어떤 것이 펼쳐지는 느낌. 박준호는 시우를 더 단단히 안았다. "우리 함께 있자."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시우의 손이 박준호의 등을 할퀴었다. 약한 힘이었지만, 그 손가락 끝이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거칠다. 울퉁불퉁하다. 박준호는 시우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암흑 속에서도 보였다. 아이의 손가락이 검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검은색이 손등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잉크가 펴지듯이. "시우." 박준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손 봐." 거실의 은색 빛이 다시 한 번 조명처럼 내려왔다. 그 빛 속에서 시우의 손이 또렷이 보였다. 검은 자국. 글자. 아니, 기호. 박준호는 그걸 본 순간, 알았다. 일요일은 내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였다. 자정. 이미 일요일은 시작되었다. "아빠..." 시우가 울먹였다. "손이... 아파." 박준호는 시우를 더 단단히 안았다. 아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할퀼 때마다, 박준호는 느꼈다. 그 거칠기. 그 변화. 이은미가 일요일에 줄 것은 무엇이었는가. 박준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가속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 이미 너무 늦었을 수도 있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어둠. 침대의 검은 천장. 밤의 무게. 다른 한쪽은 은색의 광채였다. 투명하고, 차갑고,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빛이었다. 그것이 눈앞에 떠 있었다. 화면처럼. 아니, 정확히는 화면이었다. [SYSTEM INITIALIZE] 글자가 뇌에 박혔다. 눈으로 읽는 게 아니었다. 관자놀이를 뚫고 뇌 한복판에 직접 새겨지는 감각. 두개골이 일렁이는 것 같은 통증. 박준호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울었다. 아내의 몸은 이미 없었다. 이은미는 언제부터 옆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어제? 어제 밤? 아니면 훨씬 더 전부터? 기억이 미끄러진다. "시우." 목이 탔다. 목소리가 낡은 문처럼 긁혔다. 거실로 나갔다. 복도가 길었다. 항상 이렇게 길었나? 계단이 내려갈 때마다 무릎이 울었다. 중년의 몸. 죽음을 겪은 몸은 다시 태어나도 부서진 그릇이었다. 거실의 은색 빛이 더 진했다. 그곳에 시우가 있었다. 침대에서 떨어져 나온 아이는 항상 작아 보였다. 밤의 거실에서 소파에 앉은 시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았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시우." 박준호가 다가갔다. 아이의 손이 보였다. 검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검다. "손 봐." 박준호의 목소리가 명령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었다. 아니, 죽은 미래에서 돌아온 자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직설적이고, 따뜻할 틈이 없었다. 시우가 손을 들었다. 은색 빛이 거실을 조명하듯 다시 한 번 내려왔다. 그 빛 속에서 아이의 손등이 선명해졌다. 검은색은 손가락 끝에만 있지 않았다.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서 손등 위에 퍼져 있었다.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듯이. 아니, 더 정교했다. 무작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호였다. 글자였다. 그런데 어느 언어도 아니었다. 박준호가 본 어떤 문자 체계에도 없는 형태였다. 직선과 곡선이 어색한 각도로 만나고, 모서리가 가시처럼 돋아나 있었다. 마치 뭔가가 억지로 피부를 뚫고 나가려는 것처럼. "아빠..." 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이... 아파." 박준호는 아이를 안았다. 움직임이 서툴렀다. 죽음 후의 회귀는 육체만 돌려준 게 아니었다. 감정도 돌려주었는데,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잊게 했다. 서툰 팔로 아들을 감싸 안았다. 시우의 손가락이 박준호의 팔을 긁었다. 그 거칠기. 그 변화. 손가락 끝이 더 이상 아이의 손가락이 아니었다. 단단해졌다. 각져 있었다. 마치 손톱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괜찮아. 괜찮아." 박준호가 중얼거렸다. 자신을 달래는 말이었다. 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SYSTEM INITIALIZE] [USER: 박시우] [STATUS: MUTATION IN PROGRESS] [PHASE 1: 43% COMPLETE] 박준호의 눈이 화면을 읽는 동안, 현실이 그 주변으로 바뀌어 갔다. 거실의 은색 빛이 더 강해졌다. 조명이 아니라 복사열처럼. 피부가 따끔거렸다. 시우의 몸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빠, 무서워..." 시우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 목소리 안에 다른 음역대가 섞여 있었다. 맑은 목소리의 아래로, 더 깊은 무언가가 울리고 있었다. 박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미래에서 본 그 목소리. 18세의 시우가 내던 그 목소리가 지금 10세 아이의 목에서 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니?" 박준호가 물었다. 손으로 시우의 얼굴을 들었다.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아이였다. 하지만 눈빛이 다르기 시작했다.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화면의 버그처럼. "모르겠어. 깨어났는데... 손이..." 시우가 다시 울었다. 울음이 섞였다. 아이의 울음과 다른 무언가의 울음이. 박준호는 시우의 손을 들고 봤다. 검은 기호들이 손등 위에서 서서히 손목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정지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이은미가 일요일에 줄 것은 무엇인가. 박준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도움이 아니었다. 구원이 아니었다. 멈춤도 아니었다. 가속화였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더욱 빠르게. 더욱 깊게.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 이미 너무 늦었을 수도 있다. 박준호는 시우를 더 단단히 안았다. 아이의 몸이 떨렸다. 아니, 진동했다. 마치 그 안에 엔진이 켜지고 있는 것처럼. 화면이 또다시 떠올랐다. [PHASE 1: 47% COMPLETE]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초 단위로. "아빠..." 시우가 불렀다. 그 목소리 속에 또 다른 음역대가 추가되었다. 세 개. 아니, 그 이상. "응, 여기 있어. 아빠가 여기 있어." 박준호가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빠는 여기 없었다. 죽은 자가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