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의는 됐고 던전이나 파겠습니다# 제1장
아침 여섯 시. 준호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천장의 곰팡이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습기 찬 반지하 방의 천장엔 언제나 그 자국들이 있었다. 지난 열 해 동안이나. 아니, 지난 열 해가 아니라 열 네 해를 포함해서라면... 준호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새벽의 뇌는 위험했다. 회귀 이후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침대 아래에서 쏟아져 나온 의류들을 밟으며 일어났다. 세탁한 지 얼마나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헌터조합 사무실이 문을 여는 시각이었다.
샤워는 냉수로 삼십 초. 거울 앞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때 준호는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다. 무던함.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 중간쯤의 무던함이었다. 좋았다. 이런 표정이 돈을 더 잘 벌었다.
옷을 입는 동안 준호의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회색 후드티, 검은 트레이닝 바지, 벨크로로 조절하는 운동화. 지난 열 네 해 동안 갈아입지 않은 제복 같은 것들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엔 이미 오늘의 의뢰 목록이 떠 있었다.
'저등급 몬스터 소탕, 보상금 80,000원.'
'주택가 저급 던전 스캔, 보상금 120,000원.'
'폐건물 잔류 마력 제거, 보상금 60,000원.'
준호는 화면을 스크롤했다. 언제나처럼 F등급 헌터들을 위한 일감들이었다. 위험도 낮고, 보상금도 낮고, 경쟁은 높은.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한 달에 삼백만 원 정도는 벌 수 있었다. 서울 변두리 반지하 방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했다.
헌터조합 사무실은 강남역 근처였다. 준호는 버스를 탔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택시비는 묵묵히 저축해야 할 돈이었다. 다른 가능성들을 위한 자본금 말이다.
버스 안은 이미 출근길 인파로 가득 찼다. 준호는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다봤다. 서울의 아침은 언제나 같았다. 바쁘고, 무겁고, 누구도 누구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열 네 해와 이번 열 해를 다 겪은 준호의 눈에는 이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 회사원 저 사람, 삼 년 뒤에 몬스터에 물려 죽겠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준호는 계속 창 밖을 봤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견뎌낼 것이고, 누군가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예 그것을 피할 길을 찾을 것이다. 준호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하고 싶었다. 아니, 속하고 있었다. 이미.
헌터조합 사무실의 로비는 좁았다. 벽 한쪽에는 의뢰 게시판이 붙어 있었고, 반대쪽에는 헌터 등급 현황판이 있었다. 회색으로 칠해진 F등급 섹션엔 이미 서너 명의 헌터들이 몰려 있었다. 준호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무명적 존재로 남았다. 이것도 기술이었다.
"이준호."
카운터 뒤의 직원이 준호를 불렀다. 서른 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준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은영. 지난 열 네 해에서도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준호를 특별히 다루지 않았다. 좋았다.
"오늘 뭘 하실?"
"세 개 다 하겠습니다."
준호는 화면 위의 의뢰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은영이 눈을 들었다.
"한 날에?"
"가능합니다."
"F등급이 한 날에 세 개를 다 하는 건... 보험 처리가 좀 복잡할 수 있어요. 하나씩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준호는 조용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자신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들려야 했다.
"저 능력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좋아요. 서명해 주세요."
준호는 태블릿 위에 서명했다. 이미 몇 백 번이나 해본 서명이었다. 이 서명과 함께 그는 법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세우는 것이었다. 던전에서 죽어도 헌터조합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게 계약서의 내용이었다.
"첫 의뢰 위치입니다. 강동구 천호동. 아파트 지하실에 저등급 몬스터들이 목격됐어요. 아마 C급 이상의 던전 게이트에서 나온 것 같고요. 위험도는 낮지만..."
"알겠습니다."
준호가 휴대폰에 주소를 받으면서 김은영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멈췄다. 그 순간의 침묵이 중요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녀는 준호를 다시 한 번 관찰했고, 준호는 그것을 느꼈지만 느끼지 않은 척했다.
"조심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준호는 헌터조합을 나왔다. 밖의 햇살이 낯설게 강렬했다. 지난 열 네 해의 많은 부분이 던전 속에서 지나갔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다를 거라고 준호는 생각했다.
강동구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을 자지는 않았다. 그저 기억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천호동의 아파트 단지. 지하실의 저등급 몬스터들. 그 모든 것이 이미 한 번 겪은 것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음 해에 겪게 될 일들이었다.
준호의 입가에 아주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으니까.
도시의 일상 속에서, 무명의 F등급 헌터 이준호는 이미 한 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지하철을 내린 지 삼 시간 후.
준호는 강동구청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식어가고 있었고, 휴대폰 화면에는 헌터조합의 의뢰 게시판이 떠 있었다. 천호동 아파트 지하실 의뢰는 이미 완료 처리되어 있었다. 소탕 시간 23분. 보상 430만 원. 깔끔했다.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박민지였다.
─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준호는 화면을 바라봤다. 메시지 위에는 작은 프로필 사진이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의 얼굴. 날카로운 눈매. 그녀가 눈을 감고 있을 때도 마음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 네. 괜찮습니다.
답장을 보낸 지 십 초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준호님. 오신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성과가 나네요." 박민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끝에 톤이 올라가 있었다. 질문의 형태였지만 확인의 의도였다.
"의뢰를 완료했을 뿐입니다."
"완료한 거 맞아요. 사실 저는 당신이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전화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동구 의뢰는 원래 중급 헌터 둘이 들어가는 물건이었어요. 당신은 혼자 23분 만에 끝냈고."
준호는 아메리카노의 잔을 들었다. 벌써 식은 커피. 그는 마시지 않았고, 그저 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박민지가 웃음을 흘렸다.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당신이 그걸 믿어요?"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침묵이 흘렀다. 전화 너머에서 박민지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준호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쉬는 게 아니었다. 계산하는 것이었다.
"준호님. 이번엔 다른 의뢰가 있어요."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공식 경로가 아닌."
준호의 손이 멈췄다. 잔을 들었다 놨다 하던 손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관심 없습니다."
"아직 내용도 안 들었는데?"
"상관없습니다."
박민지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마치 약한 상대방을 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당신이 이런 사람일 줄 알았어요. 정직한 헌터 말이에요. 조합 규정을 지키고, 공식 의뢰만 수행하는 그런 성격 말이에요." 그녀의 음성에서 조롱이 묻어났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십 년을 F등급으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게. 그게 왜일까?"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돈이 필요해서일까요? 아니면 뭔가를 준비 중인 걸까요?" 박민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 잠깐. 혹시 당신 옛날 기억이 돌아왔나요? 사고나 던전 낙상으로 인한 뇌 손상에서 회복되었다던지."
침묵.
"앞으로 계속 F등급 의뢰로 생계를 유지하실 거에요? 430만 원짜리 저등급 던전 파밍을 계속 하면서요? 당신이 정말 중급이라면 그건 너무 아깝지 않나요?"
준호는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떨어뜨렸다. 카페의 소음이 섞여 들어왔다. 커피 머신의 음성. 사람들의 목소리. 숟가락이 찻잔에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게 함께 들렸다.
"의뢰의 내용을 말해 주세요."
"아. 그래서 당신이 좋아요." 박민지의 목소리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실리를 본다는 거죠."
"의뢰의 내용."
"강남 구룡산 근처 주택가 지하. 일 주일 전부터 주민들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대요. 신고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던전인지 몬스터인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그리고..." 박민지가 말을 끊었다. "조사를 나간 헌터 둘이 들어간 지 24시간이 지났는데 나오지 않았어요."
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주 미묘하게.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그건 헌터조합에 신고해야 합니다."
"신고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박민지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 둘이 제 길드 소속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공식 의뢰가 아니었어요. 비공식 사전 조사였고요."
구룡산. 준호는 그 지명을 곱씹었다. 강남. 2035년.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저등급 던전이 아니었다.
"보상은?"
"첫 번째 임무는 강남 구룡산 지하 상황 파악. 둘째는 제 길드원 둘의 생사 확인. 셋째는..." 박민지가 조용히 말했다. "처리."
"처리?"
"당신이라면 알겠죠. 던전이라면 없어졌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있는 거고."
준호가 창밖을 봤다. 햇살이 여전히 낯설게 강렬했다. 강동구의 평범한 거리. 아파트와 편의점과 사람들. 이 모든 게 2025년이었다.
"보상은?"
"일단 5천만 원. 생사 확인 추가 시 3천만. 그리고 만약 처리까지 완료하면..." 박민지가 숨을 쉬었다. "1억."
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헌터조합 의뢰 게시판이 떠 있었다. 앞으로 열 해를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앞으로 열 해.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것들.
"정보를 더 줄 수 있으세요?"
박민지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승리한 사냥꾼의 웃음이었다.
"좋아요. 당신 마음에 들어요. 현명한 결정입니다."
전화가 끝났다.
준호는 식은 아메리카노를 입에 가져갔다.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강남 구룡산의 지하를 떠올렸다. 2035년의 그곳.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것들.
다른 가능성.
그것을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힘이 필요했다. 조합의 공식 경로 안에선 그것을 모두 얻을 수 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여전히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