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의는 됐고 던전이나 파겠습니다폐허의 탑은 강남역 지하 5층 맨 끝에 있었다.
공식 지도에는 없는 구간. 관리사무소도 모르는 영역. 준호는 박민지가 건넨 카드키를 손에 쥐고 철제 문 앞에 섰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아메리카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드 접촉."
이미 알고 있던 음성이었지만, 목소리는 낯설었다. 여성의 목소리.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합성음이 아니라, 감정을 삭제한 실제 목소리였다.
카드를 재더기에 댔다.
철문이 밀렸다. 공기 압의 변화가 귀청을 찔렀다. 음압. 밀실이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는 증거였다. 준호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산소 함량은 정상. 환기 시스템이 작동 중이었다.
LED 조명이 천장에서 켜졌다. 하나, 둘, 셋. 복도를 따라 연쇄적으로 점등되었다.
복도의 길이는 약 50미터. 벽면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암반이었다. 원래부터 지하동굴이 있던 자리를 확장한 것. 벽면의 갈라진 자국들은 채굴의 흔적이었고, 일부는 손톱으로 긁은 것처럼 보였다. 준호는 그쪽을 보지 않기로 했다.
"신원 확인."
다시 그 목소리였다.
"이준호."
"헌터 등급?"
"E급."
침묵이 흘렀다. 3초. 길었다.
"등급이 맞지 않습니다."
준호의 손이 자동으로 주머니로 갔다. 박민지의 카드는 여기까지만 유효하다는 뜻이었다.
"박민지 의뢰."
그 순간, 복도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시스템이 처리하는 시간이었다.
"확인되었습니다. 진입을 허가합니다."
철제 게이트가 올라갔다. 그 너머로 더 큰 공간이 드러났다.
준호는 한 발을 내디뎠다.
공간이 확장되는 순간, 온도가 떨어졌다. 대략 12도. 지하동굴의 자연 온도와는 다른 냉각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온도였다. 신선한 고기를 보관하기에 적당한 온도. 또는 다른 것들을.
천장은 15미터 이상 높았다. 원래는 더 높았을 테지만, 일부가 굳어진 검은 물질로 봉인되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나 응고물. 던전의 핵심 부분을 막을 때 사용되는 물질.
복도의 벽면을 따라 철제 선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반 위에는 투명한 용기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결정체들이 들어 있었다. 대략 100개 이상. 색깔은 다양했다. 푸른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
마나 스톤. 하지만 질과 크기가 일반적인 것과 달랐다.
준호는 걸음을 멈추고, 가장 가까운 용기를 들었다.
"만지지 마세요."
목소리가 즉각 반응했다.
"이것들이 뭐죠?"
"그 정보는 당신의 의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준호는 용기를 다시 내려놨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용기 표면의 온도차였다. 내부는 극저온 상태였다.
공간을 가로질렀다. 반대쪽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번엔 철문이 아니라 목재였다. 낡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문틀은 새것이었다. 최근에 교체된 것.
"이 너머가?"
"강남 구룡산 지하 1층. 비공식 던전 '폐허의 탑' 진입부입니다."
준호의 호흡이 깊어졌다. 비공식. 그 말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조합의 감시를 받지 않는 던전.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공간.
"2035년에도 여기가 있었나?"
침묵이 길어졌다. 이번엔 시스템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당신의 의뢰는 생사 확인입니다. 추가 정보 요청은 허가되지 않습니다."
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박민지도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알고도 말하지 않는 것. 둘 다 위험했다.
문을 밀었다.
손잡이는 따뜻했다. 누군가가 최근에 만진 흔적. 손가락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어둠이 펼쳐졌다.
준호는 한 발을 내디뎠고, 문이 그의 뒤에서 닫혔다.
패닉을 밀어냈다. E급 헌터는 이 정도 상황에서 패닉하지 않는다. 실제 실력이 어떻든, 박민지의 눈 안에선 그러해야 했다.
손전등을 켰다. 어둠을 뚫고 빛이 전진했다.
계단이었다. 돌계단. 폭은 1.5미터 정도. 그리고 그 아래로는 더 깊은 어둠이 있었다. 손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
준호는 천천히 내려갔다.
한 발, 한 발.
발소리가 돌 위에서 울렸다. 에코가 돌아왔다. 공간이 컸다. 아주 컸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흙냄새와 뭔가 썩은 것의 냄새. 그리고 금속의 냄새. 녹슨 철의 냄새. 아니, 혈액의 냄새였다.
2035년. 그 계단 위에서 준호는 비명을 들었다. 길드원 신은미의 비명. 그 소리는 14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손전등이 흔들렸다. 빛이 벽면을 훑었다. 그 벽면에는 손톱 자국이 있었다. 많은 손톱 자국들. 누군가가 미친 듯이 벽을 긁었던 흔적들.
그리고 그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도와...줘..."
준호는 손전등을 멈췄다.
글씨는 손가락으로 쓴 게 아니었다. 손톱으로 깔린 돌을 긁어낸 것이었다. 매우 오래전에.
계단의 끝이 나타났다.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손전등의 빛이 천장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도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빛을 아래로 향했다.
바닥은 약 10미터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곳곳에.
준호의 손이 떨렸다. 손전등의 빛이 요동쳤다.
그것들은 해골이었다.
수십 개의 해골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손전등을 떨어뜨릴 뻔했다.
준호는 손가락을 부르르 떨며 다시 불빛을 정렬했다. 해골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일부는 완전했다. 일부는 갈비뼈만 남겨져 있었다. 하나는 팔뼈 두 개가 마치 도움을 청하는 제스처처럼 놓여 있었다.
14년 전의 기억이 밀려왔다. 신은미의 손가락. 그 손가락이 유리관을 두드리던 모습.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랐다면.
'아니다.'
준호는 이를 깨물었다. 지금은 아니다.
마나를 모았다. 몸을 감싼 무색의 에너지가 희미하게 떨렸다. 극저온 보관 구간의 마나 석이 도와줬다. 그의 회귀 능력이 보유한 기억 속의 마나 감각이 깨어났다.
계단의 마지막 단에 섰다.
점프할 거리가 멀었다. 10미터. 준호는 한 번 숨을 쉬고 몸을 날렸다.
하강하며 마나를 발 아래로 모았다. 착지 직전, 에너지가 폭발하듯 분산되었다.
쿠르렁.
먼지가 일었다.
손전등이 아직도 들려 있었다. 빛이 흔들렸다. 준호는 제일 가까운 해골부터 살폈다. 완전한 골격이었다. 뼈의 색깔은 회백색. 적어도 수년은 여기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의 옷깃이 스치는 바람에 뼈가 딸그락 굴렀다.
준호는 몸을 굳혔다.
공간 어딘가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손전등의 빛이 맞지 않은 곳. 어두움 속에서. 뭔가 큰 것이 움직였다.
"누구냐?"
준호가 손전등을 휘저었다.
그 순간, 어둠에서 것이 뛰어나왔다.
생물이었다. 생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몸길이 2미터를 넘는 개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개가 아니었다. 피부는 썩은 회색빛이었고, 근육이 드러난 부분이 곳곳에 있었다. 눈은 없었다. 대신 눈 자리에는 검은 구멍만 있었다.
그리고 입. 그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던전 몬스터. 폐허의 탑이 만든 것.
준호는 뒷걸음질을 쳤다.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몸 전체에 마나를 풀어냈다. 무색의 기운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회귀 기억이 가져온 힘.
괴물이 울음을 냈다.
그것은 짖음이 아니었다. 으르렁거림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비명 같은 소리였다. 길고, 끔찍하고, 절망적인.
"으악!"
준호는 직관적으로 몸을 날렸다.
괴물이 내달렸다. 발톱이 준호가 있던 자리를 할퀴었다. 돌이 폭발하듯 부서졌다. 먼지가 자욱했다.
준호는 공중에서 몸을 굴렸다. 착지하며 즉시 역방향으로 움직였다. 괴물이 회전했다. 그것의 속도는 빨랐다. 매우 빨랐다.
펀치를 날렸다.
마나를 집중시킨 주먹이 날아갔다. 괴물의 옆구리에 맞았다.
쾅.
괴물은 밀려나갔다. 20센티미터쯤. 그리고 금방 멈췄다.
'뭐하는 거야?'
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정도 충격은 약한 C급 몬스터라면 날아갈 거리였다. 하지만 이 것은 멈췄다. 마치 그 정도는 기침 정도인 것처럼.
괴물이 다시 울음을 냈다.
이번엔 목표가 명확했다. 그것이 달렸다. 네 발이 거의 동시에 땅을 박었다. 속도는 처음보다 빨랐다.
준호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괴물이 통과했다. 발톱이 연속으로 돌을 긁었다. 스파크가 튀었다. 쇠를 갈아내는 소리가 울렸다.
'이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회귀 14년 전의 기억 속에는 폐허의 탑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때 준호는 이 곳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 신은미가 비명을 질렀던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다.
괴물이 재빠르게 돌아섰다. 준호의 동작보다 빨랐다.
발톱이 준호의 팔을 노렸다.
준호는 마나 방어막을 그려냈다. 황금빛 에너지가 팔 앞에 응고되었다.
괴물의 발톱이 그것을 할퀴었다.
쨍.
방어막이 깨졌다. 마나가 폭산했다. 준호의 팔이 뒤로 밀려났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발로 즉시 후속 공격을 했다.
준호는 구르며 피했다. 발톱이 그의 등 위를 지나갔다. 후드가 찢어졌다. 피부에 열감이 전해졌다. 가늘게 그어진 상처. 깊지는 않지만, 나왔다. 피가.
'이 정도면 B급... 아니, 상위 B급이다.'
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14년 전 기억에 남아 있는 자신의 실력은 B급 초반. 그것도 신중하게 사냥할 때의 레벨이었다. 이 괴물은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견디고, 속도에서 밀리고 있었다.
괴물이 다시 울음을 냈다.
그 울음은 더 가까웠다. 더 크게. 더 오래.
준호는 마나를 모두 방출했다. 황금빛이 폭발하듯 몸 주위에 퍼졌다. 괴물이 흔들렸다. 그 정도 폭발은 괴물의 피부를 그을렸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은 다시 달려왔다.
준호의 눈이 떨렸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계단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10미터. 아니, 이미 더 멀어졌을 수도 있다.
'다시 올라갈 수는 없다.'
괴물의 발톱이 준호의 어깨를 목표로 했다.
준호는 몸을 굴렸다. 손에 마나를 모았다. 주먹을 만들었다.
이번엔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그것을 자신의 몸에 집어넣었다.
마나가 전신으로 퍼졌다. 근육이 뜨거워졌다. 신경이 팽팽해졌다. 14년 전의 기술. 이름도 없는, 이름 지을 필요도 없는 기술. 단순히 자신의 육체를 강제로 가속시키는 것.
괴물의 발톱이 준호의 얼굴을 스쳤다.
준호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괴물의 옆구리에 그대로 부딪혔다.
둘 다 바닥으로 굴렀다.
준호는 그 위에서 주먹을 내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괴물은 울음을 질렀다. 그것의 뒷발이 준호를 걷어찼다.
준호는 날아갔다. 돌에 등이 부딪혔다. 통증이 폭발했다.
그 순간, 어둠 위쪽에서 뭔가 빛났다.
손전등이었다. 아직도 켜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이, 마침내 바닥에 닿아 있는 것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에 비친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해골 무더기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더 많은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