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한 균열의 지배자# 계산
던전 심층부의 공기는 산소 농도가 현저히 낮았다. 호흡할 때마다 가슴 안쪽이 철침처럼 쑤셨다. 하지만 준혁은 이미 그런 고통에 익숙했다.
'기록을 역기록한다.'
그는 균열 앞에 섰다. 벽의 인위적인 틈.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것. 아니, 외부의 누군가가 벌려놓은 입.
균열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차갑고 매끈했다. 마치 유리를 자른 듯. 혹은 현실을 깎아낸 듯.
[기록자 직업 창을 열겠습니다]
"열어."
준혁이 말했다.
화면이 떴다.
```
【기록자】
─────────────────
현재 상태: 이준혁 (F→?)
힘: 100 | 민첩: 87 | 지능: 156 | 운: 23
체력: 78 | 감지: 112
─────────────────
```
그는 스탯을 바라봤다. 수치들.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된다.
'기록을 역기록하려면.'
손가락을 균열에 밀어 넣었다. 저항이 없었다. 마치 물에 손을 넣는 것처럼. 세계가 그를 받아들였다.
[기록 편집 모드 활성화]
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탯 화면이 변했다. 슬라이더처럼. 각 능력치 옆에 숫자를 직접 입력할 수 있는 입력창이 생겼다.
'박수진.'
S급 검사. 현재 추적 중. 시간이 없다.
'그럼 빠르게.'
준혁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
힘: 100 → [ ]
```
입력창에 9999를 입력했다.
화면이 떨렸다.
```
[오류: 기록자 직업의 기본 설정값을 초과합니다]
```
"초과하면 어떻게 되는데?"
준혁이 물었다.
시스템이 침묵했다.
준혁은 9999를 다시 입력했다.
```
[경고: 육체 변형이 발생합니다]
```
"그래. 진행해."
균열에 박힌 손가락에서 열이 올라왔다. 마치 용광로 속에 손을 담그는 것 같았다. 뼈가 소리를 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준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
힘: 100 → 9999
민첩: 87 → [ ]
```
다음 입력창이 나타났다.
"0으로."
```
민첩: 87 → 0
```
입력했다.
```
[경고: 기동 능력 상실 예상]
```
"다음."
```
지능: 156 → [ ]
```
여기서 멈췄다. 지능은 필요했다. 분석 능력. 기록을 읽는 능력.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100으로."
```
지능: 156 → 100
```
```
운: 23 → [ ]
```
"0으로."
```
체력: 78 → [ ]
```
"1로."
```
감지: 112 → [ ]
```
"0으로."
화면 전체가 붉게 변했다.
```
【기록자】
─────────────────
현재 상태: 이준혁 (F→?)
힘: 9999 | 민첩: 0 | 지능: 100 | 운: 0
체력: 1 | 감지: 0
─────────────────
[기록이 갱신되었습니다]
[세계가 재구성됩니다]
```
균열에서 손을 빼는 순간, 준혁의 몸이 변했다.
팔이 부풀어올랐다. 어깨가 벌어졌다. 가슴이 철벽처럼 굳어졌다. 근육이 뼈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극한의 고통. 하지만 동시에 극한의 힘.
그는 손을 펼쳤다.
손가락 하나로 바위를 눌렀다. 바위가 부스러졌다.
'작동한다.'
준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움직임이 둔했다. 민첩도 없고, 감지도 없으니 당연했다. 세상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아니, 그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없다.'
보스 전투는 거리 전투가 아니다. 근거리 격투다.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준혁이 움직이려 할 때, 화면에 알림이 떴다.
```
[박수진 국장: 5km 이내 진입]
```
'빠르다.'
준혁이 중얼거렸다.
```
[박수진 국장: 3km 이내]
```
'추적 강화.'
균열이 떨렸다.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열이 확장되고 있었다. 마치 입을 벌려 누군가를 삼키려는 것처럼.
"준혁!"
한지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지은을 버렸다. 아니, 버려야 했다.
'기록을 역기록하는 과정에서 기존 기록이 충돌한다. 그 충돌의 피해자는 주변인이다.'
화면에 더 많은 알림이 떴다.
```
[박수진 국장: 1km 이내]
```
```
[한지은의 기록이 불안정화되고 있습니다]
```
```
[경고: 협력자의 신체 이상]
```
준혁은 이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거짓을 말했다.
"괜찮아."
그건 한지은을 위한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거짓이었다.
```
[박수진 국장: 심층부 진입]
```
검사 박수진이 나타났다.
여전히 우아한 자세로. 하지만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준혁이 자신의 기록을 역기록하는 순간, 그 파장이 박수진까지 미쳤다.
"뭘 한 거야?"
박수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스템이 말한다. 세계의 기록이 갱신되었다고. 너는... 뭘 한 거야?"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을 내디뎠다.
발이 바닥을 부수고 들어갔다. 콘크리트가 모래처럼 흩어졌다.
민첩이 0이라 움직임은 느렸다. 하지만 힘은 행성을 부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박수진이 칼을 뽑았다.
S급 검사의 칼. 아우라로 뒤덮인 칼.
"너는 이미 F급이야. 뭘 할 수 있는 거야?"
준혁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걸었다. 한 발, 한 발. 땅이 균열로 깨졌다.
```
[기록자의 역기록이 진행 중입니다]
[세계의 충돌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
박수진의 칼이 준혁의 가슴을 향했다.
칼날이 닿자, 준혁의 가슴이 빛났다.
9999의 힘이 아우라를 깨물어 먹었다.
박수진의 팔이 뒤로 밀려났다.
"불가능해..."
박수진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준혁은 이미 그 앞에 있었다. 느린 움직임으로,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궤적으로.
준혁이 주먹을 휘둘렀다.
박수진이 칼로 막았다.
칼이 부러졌다.
S급 무기가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박수진의 눈이 확대되었다.
```
[박수진 국장: 기록 변경 시도]
```
시스템이 공지했다.
```
[실패: 이미 역기록된 기록은 수정 불가]
```
준혁은 박수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음을 계산하고 있었다.
'보스까지 거리: 200m.'
'남은 시간: 3분 30초.'
'한지은의 생존율: 47%.'
'박수진의 추적 재개: 불가피.'
'그래도, 충분하다.'
준혁이 박수진을 밀쳤다. 검사는 벽에 부딪혔다. 돌이 인간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준혁은 더 깊은 어둠으로 걸어들어갔다.
발 아래로는 기록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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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부딪힌 박수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입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아우라가 남긴 자국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부러진 칼날을 보았다. S급 무기였다. 신화급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손가락처럼 쉽게 꺾여 있었다.
박수진의 손가락이 떨렸다.
'9999.'
그 숫자가 그녀의 뇌를 파고들었다. 인간의 통계에는 없는 수치였다. 최고 기록은 S급 근력자들의 500대였다. 그것도 극도의 강화 기술을 동원해서였다. 9999는 게임이었다. 농담이었다.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어났다.
박수진은 손목을 이용해 벽을 짚었다. 통신기를 켰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이건 더 이상 추적 임무가 아니었다. 이건 안보 사태였다.
"전 부서에 긴급 공지."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정은 이미 계산으로 변했다.
"이준혁. F급 각성자. 현재 심층부 200m 지점에서 확인. 상태: 극도의 스탯 편성 상황. 목표: 불명. 위험도: 테러 수준."
통신망이 이글거렸다. 박수진의 목소리는 정부 통신망을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재지명. 이준혁을 국제 테러리스트로 공개 지명한다. 모든 각성자에게 제거 권한 부여. 우선순위: S급."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박수진은 중얼거렸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전력뿐이다."
---
서울 각성자 관리국 본부.
화면들이 일제히 깜박였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테러리스트 지명?"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매뉴얼이 있는 상황이었다. 사무실 가득한 손가락들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정보가 흘러나왔다. 이준혁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뉴스가 터졌다.
---
런던의 어느 길드 본부.
LA의 헌터 협회.
도쿄의 초능력 연맹.
뉘른베르크의 유럽 감시 기구.
모든 곳에서 같은 이름이 울려 퍼졌다.
**이준혁.**
F급.
테러리스트.
제거 대상.
---
지하 1000m, 심층부.
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통신망의 소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시스템은 그런 것들을 여과시키지 않았다. 세상의 목소리는 모두 기록이고, 기록은 모두 신호였다. 준혁은 그 신호들을 읽었다.
"국제 테러리스트로 지명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준혁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박수진의 계산은 정확했다. 정부 조직이 할 수 없는 것을 개인은 못 하니까, 세상 전체를 적으로 만드는 게 더 빠르다는 뜻이었다.
'좋은 전술이다.'
준혁은 손가락을 세었다. S급 각성자들. 몇 명이나 움직일까? 전 세계에는 대략 200명 정도였다. 그 중 한국에는 20명. 아니, 이제는 19명이다. 박수진 때문에 하나가 줄었으니까.
'생존 확률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준혁은 어둠 속을 걸었다. 발 아래로는 부서진 기록들이 먼지처럼 날렸다. 시스템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왜일까? 보통이라면 벌써 여러 번 경고를 했어야 했다. 역기록의 대가, 세계 충돌의 가속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시스템은 조용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
서울 강남 지구의 어느 고급 아파트.
최민재가 뉴스를 봤다.
화면에는 준혁의 얼굴이 떴다. 그의 얼굴은 평정했다. 감정이 없었다. 마치 기록된 이미지처럼.
최민재는 스크린을 껐다.
"이 미친 놈이."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욕이 아니었다. 인정이었다. 준혁이 정말로 이걸 해냈다는 뜻이었다. 세상을 적으로 만드는 것. 그것도 한 방에.
최민재는 휴대폰을 집었다. 길드의 간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준혁 관련 모든 기록을 지워라. 우리 길드와의 연결고리는 남기지 마.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데 손가락이 떨렸다.
"그놈이 여기에 오면, 보지 못했다고 해."
---
지하 심층부.
준혁은 걷고 있었다.
시계 시간으로는 2분 40초가 남아 있었다. 보스까지는 140m.
한지은의 생존율은 41%로 내려갔다.
'기록이 붕괴되고 있다.'
준혁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공기가 떨렸다. 기록이 부서지는 진동이었다. 균열이 더 넓어지고 있었다. 그의 스탯 편성 때문이었다. 9999의 힘은 세계 자체와 충돌하고 있었다.
'모순이다.'
준혁은 생각했다.
'내가 강해질수록, 세계는 약해진다. 내가 기록을 편집할수록, 다른 기록은 붕괴한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 강함인가?'
걸음이 멈췄다.
아니다. 지금은 멈춘 게 아니었다. 준혁은 계속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 계산이 시작되어 있었다.
'박수진은 현재 추적 불가능한 상태. 다른 S급 각성자들은 최소 3시간 후 도착. 정부 특수 부대는 이미 출동 중. 추정 도착 시간 45분.'
'충분하다. 보스를 만나기에는.'
준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뒤쪽에서 굉음이 났다. 지표면에서 내려오는 소리였다. 수십 명이 지하로 진입하는 음향이었다. 정부 부대였다.
'이미 왔다.'
준혁은 더 깊이 내려갔다.
기록의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것은 마치 세계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준혁은 듣지 않기로 했다. 그냥 걸었다. 더 깊이, 더 어두운 곳으로.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뭔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준혁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만나면, 모든 게 바뀔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