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귀한 균열의 지배자던전의 심층부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이끼로 뒤덮인 암벽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주지 않았다. 준혁은 한 발씩 신중하게 내디뎠다. 한지은이 뒤를 따랐고, 그녀의 숨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 — 빠르고, 불안정하고, 통제되지 않은.
"혼자 내려갈래?"
준혁이 물었다.
"아니야. 같이 가."
한지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준혁은 그것을 알았다. 방금 전 자신이 말한 것들이 그녀의 뇌를 어떻게 압박하고 있는지도 알았다. 최민재. 비리. 시스템 조작. 그리고 자신.
F급 각성자가 A급 보스의 정보를 읽어낸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준혁의 눈이 수치로 가득 찼다.
**[심층부 진입 감지]**
**[환경: 습도 87%, 온도 13℃, 마나 농도 4.2]**
**[생체 신호 감지: 1 (준혁), 1 (한지은)]**
**[이상 신호 감지: 1]**
이상 신호.
그것은 보스였다.
암흑 속에서 준혁은 손가락을 들었다. 시스템의 창이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직업 란이 떨렸다.
**[직업: 기록자 (F급)]**
**[보유 능력: 시스템 데이터 해독]**
**[숨겨진 능력: ?]**
**[조건: A급 이상 생명체 조우]**
준혁의 심장이 멈췄다.
'조건?'
마치 선택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화면이 깜박였다. 그리고 새로운 창이 떴다.
**[직업 변경 가능]**
**[선택지 1: 기록자 (F급) 유지]**
**[선택지 2: A급 전사로 각성]**
**[경고: 각성에 따른 신체 변화 발생. 회귀 특성상 신체 거부 반응 가능]**
준혁은 숨을 멈췄다.
'이건... 뭐야?'
뒤에서 한지은의 발자국이 들렸다. 그녀가 옆으로 섰다. 그리고 그녀의 눈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준혁은 비로소 이해했다.
자신이 F급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항상 F급이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F급으로 분류했다는 것을.
준혁의 손이 흔들렸다. 터치스크린 위에서. 그는 선택지를 누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
**[감시 신호 감지]**
**[박수진의 원격 모니터링 활성화]**
**[좌표: 지상 E급 관리소, 거리 1.2km]**
**[신호 강도: 중]**
**[추적 가능성: 높음]**
준혁의 얼굴이 굳었다.
'박수진이... 날 보고 있어?'
한지은이 소리쳤다.
"준혁! 뭐가 보여?"
준혁은 화면을 닫았다. 손가락 한 번으로. 움직임은 자동으로 나왔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움직임이었다. 회귀자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을 숨기는 방법을.
"보스다."
거짓을 말했다.
"거리?"
"200미터. 아래."
한지은이 검을 뽑았다. 검의 금속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준혁은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박수진이 왜 자신을 감시하는가.
최민재가 왜 자신을 죽였는가.
그리고 자신이 왜 F급으로 분류되어 있는가.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
매우,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준혁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지은, 잠깐 멈춰."
"뭐?"
한지은이 물었다.
"우리가 지금 감시받고 있어."
어둠 속에서 한지은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박수진이. 원격 모니터링. 신호 강도 중. 추적 가능성 높음."
준혁은 숫자로 말했다. 감정 없이. 마치 기계처럼.
"그럼... 우리가 보스를 처리하는 걸 다 본다는 거야?"
"그래."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 어떤 전술을 펼치는지, 모든 것을 볼 거야."
한지은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왜 문제야? 우리가 뭔가 숨길 게 있어?"
준혁은 그녀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그리고 한지은의 얼굴이 보였다. 순수한 얼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지.'
준혁이 생각했다.
'넌 단지 같이 일하는 사람일 뿐이야.'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자신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 회귀의 기억 속에서. 뭔가가 준비되고 있었다. 뭔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
준혁은 숨을 쉬었다. 길고, 천천히.
"문제는 없어. 가자."
그리고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심층부로. A급 보스를 향해.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직업 창은 떠 있었다. 손에 들린 것처럼. 아직도 선택지를 기다리면서.
**[직업 변경 가능]**
**[선택지 1: 기록자 (F급) 유지]**
**[선택지 2: A급 전사로 각성]**
준혁은 터치하지 않았다.
아직 아니었다.
지금은, 단지 관찰해야 했다.
박수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최민재의 비리가 정말로 단독 행동인지.
그리고 자신 위에 있는 시스템의 모순이 무엇인지.
모든 것을 기록해야 했다.
시스템이 하듯이.
# 균열
던전의 심층부는 침묵했다.
발바닥이 딛는 돌의 질감, 공기 중에 떠다니는 황산화합물의 냄새, 그리고 벽면을 따라 흐르는 마나의 진동. 준혁은 모든 것을 동시에 감지했다. F급 각성자라는 분류는 거짓이었다. 이 정밀한 감각들은 어느 정도 수준의 각성자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
그는 생각했다. 회귀자의 기억이 정확했다. 전생에서 이 던전을 여러 번 탐사했다. 그 기억들이 지금 이 육체 속에 존재했다.
한지은이 뒤를 따랐다. 손전등의 빛이 준혁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온도가 떨어지고 있어. 보스 영역이 가까워진 거 같은데."
"그래."
준혁은 응답했지만, 그의 집중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벽면의 균열.
처음에는 자연 침식처럼 보였다. 동굴 자체가 오래된 것이고, 던전은 지속적으로 마나에 의해 부식되고 변형된다. 균열 따위는 흔했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준혁이 손을 들어 벽에 닿았다. 그 순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반응했다. 수치들이 떠올랐다.
**[균열 분석 중...]**
**[마나 방출률: 3.7%]**
**[균열 형성 시간: 약 72시간]**
**[인위적 개입 흔적 감지]**
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봤어?"
한지은이 다가왔다.
"아니. 계속 가자."
거짓이 혀 위에서 굳어졌다. 그가 한지은을 바라봤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의심이 없었다. 믿음만 있었다. 그것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준혁은 다시 벽을 향했다.
이번에는 더 깊이 분석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열고, 자신의 인식을 그 균열의 본질에 맞춰 집중했다. 회귀자의 본능이 작동했다. 이건 메시지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
마나의 흐름을 역추적했다.
균열은 내부에서 외부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강제로 뚫린 것이었다. 정밀하게. 마치 메스로 피부를 가르듯이.
누군가가 이 던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경로를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박수진?'
아니다. 준혁은 즉시 그 가설을 버렸다. 박수진의 신호는 원격 모니터링이었다. 실시간 마나 감지 기술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물리적으로 침투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준혁의 직업 창을 다시 열었다.
**[직업: 기록자 (F급)]**
**[숨겨진 능력 활성화 가능]**
**[경험치: 거의 무한]**
**[시스템 권한: 제한됨]**
그리고 그 아래. 아까와 같은 선택지.
**[선택지 1: 기록자 (F급) 유지]**
**[선택지 2: A급 전사로 각성]**
준혁은 한지은이 충분히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했다.
"시스템."
침묵.
"시스템, 들리지?"
인터페이스가 깜빡였다.
**[사용자 호출 감지]**
준혁의 심장이 빨라졌다. 전생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시스템은 항상 자동으로 정보를 제공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이 회귀의 삶에서는 뭔가 달랐다.
"내가 F급으로 분류된 이유가 뭐야?"
**[정보 접근 권한 부족]**
"박수진이 감시하는 이유는?"
**[정보 접근 권한 부족]**
"그럼 넌 뭘 할 수 있어?"
길어진 침묵.
그리고.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준혁의 호흡이 멈췄다.
**[선택이 곧 세계입니다]**
**[당신이 기록하는 것만이 현실입니다]**
'기록자.'
준혁은 이제 깨달았다. 자신의 직업이 단순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너... 의식이 있어?"
**[의식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기록합니다]**
**[당신도 기록합니다]**
**[우리는 같습니다]**
준혁의 손이 떨렸다.
"이 균열. 넌 이것도 기록하고 있었어?"
**[네]**
**[균열은 선택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선택입니다]**
**[외부의 의도입니다]**
"외부? 박수진인가?"
**[박수진은 도구입니다]**
**[더 큰 의도의 도구]**
**[최민재도]**
**[당신의 회귀도]**
준혁이 벽에 기댔다. 세상이 한 겹 더 벗겨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럼 내 기억은? 회귀는?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실험인 건가?"
**[실험이란 무엇인가요]**
**[모든 것은 기록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선택할 때, 세계는 기록됩니다]**
준혁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것이 진짜인지 의문스러웠다.
"A급 전사로의 각성. 그것도 선택인가?"
**[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선택입니다]**
**[전생에서, 당신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한지은의 목소리가 던전을 울렸다.
"준혁! 뭐해? 보스가 깨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직업 창은 여전히 떠 있었다. 두 선택지가 깜빡였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거대한 함정. 자신이 선택할 때마다, 누군가는 그 선택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록을 통해 자신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자."
준혁이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기록하면 어떻게 되지?"
**[...]**
**[처음 질문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거꾸로 기록해버리면?"
**[...]**
**[...]**
시스템이 침묵했다.
그것이 준혁에게는 가장 명확한 답이었다.
한지은이 다시 불렀다.
"준혁!"
그는 일어났다. 직업 창을 손으로 밀어냈다. 선택지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떠 있었다. 하지만 준혁은 이제 그것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는 한지은을 바라봤다.
"가자. 보스를 만나자."
"뭔가 괜찮아?"
"괜찮아."
거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이 필요했다.
준혁은 내려갔다. 심층부로. 더 깊은 어둠으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기록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