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후가 되기 싫어서 도망친 공작 영애카렌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가락들을 모으고 펼쳤다. 떨림은 여전했다.
금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희미해졌을 뿐이었다. 손톱의 흰색 부분 위로 아주 미세한 광채가 맴돌았다. 햇빛 때문일 수도 있었다. 마을의 창밖으로 새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카렌은 눈을 감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꿈의 끝자락처럼.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그 낮고 차가운 음성이 말했던 것들——
*넌 소설 속 인물이다.*
*라이엘 공작 영애.*
카렌은 눈을 떴다. 침실의 어둠을 뚫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평범한 손이었다. 촌부의 손이었다.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관절이 굳어 있었다. 마을에서 일한 손이었다.
그런데 기억이 흘러나왔다.
검은 드레스. 금실로 수놓인 소매. 궁전의 복도로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 카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라이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혀 끝에서 낯설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서 그 이름으로 불리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라이엘, 공작 영애.*
*넌 왜 자꾸 혼자 있으려 하니?*
*궁정 내에서 혼자인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어.*
카렌의 턱이 팽팽해졌다.
그건 누구의 목소리였는가. 아버지였나. 아니면 어머니였나. 기억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물에 불린 종이처럼 겹겹이 흐릿하게 겹쳐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 안을 걸었다. 창에 붙었다. 바깥은 마을이었다. 연기 피우는 굴뚝. 낡은 지붕. 고양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그런데 눈을 더 집중하면, 그 뒤로 무언가가 보였다. 궁전의 첨탑. 담장 너머로 펼쳐진 정원. 분수에서 쏟아지는 물. 마블로 장식된 바닥.
겹쳐 있었다.
카렌은 손을 떨어뜨렸다. 손톱의 금색이 더 또렷해졌다.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인가. 카렌이——라이엘이——무엇인가.
침대 밑의 나무 상자로 다가갔다. 손으로 밀어냈다. 바닥이 먼지를 일으켰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옷. 낡은 신발. 하지만 책은 없었다.
혹시 책이 있었나? 처음부터?
카렌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궁전. 도서관. 높은 선반들. 그리고 책——
기억이 튀어나왔다. 마치 찬장에서 튀어나오는 토끼처럼.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생생했다.
*정략결혼.*
그것은 카렌의 생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이었다. 궁정의 어딘가에서, 카렌의 귀에 들렸던 말이었다.
*라이엘 영애를 비토자 백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남방의 영토를 확보하려면 그것이 필요합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카렌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궁정 내 총애받는 참모였나. 아니면 궁내부인이었나.
그 목소리에 답하는 다른 목소리——
*라이엘은 이미 충분히 고생했다.*
*또 다시 이용하려 하는가?*
남성의 목소리였다. 낮고, 무거웠다. 아버지? 공작? 그 이름조차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카렌의 것을 지켜주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렌은 침대에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기억이 계속 흘러나왔다. 마치 댐이 터진 것처럼.
*결혼식이었다.*
화려한 예식장. 흰색과 금색. 카렌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웨딩드레스. 그리고 옆에는——
비토자 백작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확실했다. 카렌의 손을 잡았던 손. 차갑고, 딱딱한 손이었다.
*축하한다, 라이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넌 내 것이다.*
카렌은 손을 내렸다.
그 이후의 기억이 더 뚜렷했다. 마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것처럼.
궁전 내의 음모들. 비토자 백작의 형제가 권력을 탐하고 있었다.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카렌은——라이엘은——그 중심에 있었다.
*넌 위험해, 라이엘.*
누군가가 말했다. 그것은 충고였나, 경고였나.
*비토자의 아내로서, 넌 양쪽 모두의 위협이 된다.*
카렌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기억의 마지막 부분이 나타났다.
*독.*
단 한 글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카렌은 궁전의 침실에서 깨어났다. 아니, 깨어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손가락이 마비되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비토자 백작의 얼굴이 위에서 보였다.
그의 표정은 안타까움이었다. 혹은 냉정함이었다.
카렌은 알 수 없었다.
*넌 나를 너무 많이 알았어, 라이엘.*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검은색이 밀려왔다.
——
카렌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철렁했다. 마을의 침실에서. 자신의 침실에서. 촛불도 없고, 창밖은 여전히 마을이었다.
손을 들었다.
금색이 이제 더 분명했다. 손톱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마치 금으로 칠한 것처럼.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맞다. 카렌은 깨달았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었다. 마을이라는 이름의 숨. 궁전이라는 이름의 숨. 꿈이라는 이름의 숨.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카렌은 창을 통해 바깥을 봤다. 마을이 보였다. 하지만 그 뒤로, 궁전의 첨탑이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손톱의 금색이 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카렌은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루시앙 카르도는 말에서 내려가며 마을을 재단했다.
재단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건축물의 높이, 돌 담장의 색깔, 우물의 위치, 가축 냄새가 풍기는 방향. 모든 것을 시간과 거리로 환산했다. 황제의 밀사로서 십 년을 해온 일이었다.
이 마을에는 여자가 없었다. 정확히는 젊은 여자가 없었다.
루시앙은 주막의 기둥에 기대며 시골 빵을 깨물었다. 딱딱했다. 이틀 전에 구워진 것이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노려봤다가 금세 시선을 거둬들였다. 검은 옷의 낯선 자는 위험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여관은?"
루시앙이 물었다. 주인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쪽 끝."
그것이 전부였다. 루시앙은 동전 하나를 놓고 나갔다. 과하게 많은 돈이었다. 그래야 입이 무거워졌다.
마을은 작았다. 일직선의 길과 좌우로 갈라지는 샛길 세 개. 주민은 이백 명 남짓. 농사꾼과 대장장이, 목수, 그리고 무언가를 파는 늙은 여자들.
여관의 문을 밀었을 때, 루시앙은 이미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방이 남았나?"
"있습니다."
여관 주인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것이 거짓의 신호였다. 루시앙은 계단을 올라가며 천장을 살폈다. 서까래의 간격, 목재의 수축 정도. 이 여관은 오 년 전쯤 증축되었다. 그리고 최근 몇 달 사이에 누군가가 이층의 한 방을 자주 사용했다.
바닥에 선착 자국이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 걸음폭이 짧았다.
*라이엘.*
루시앙은 문을 열었다. 비었다.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베개 중앙에는 머리 자국이 분명했다. 금발의 머리.
그는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마을 방향이 아니라 반대쪽,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 옆의 작은 탁자에는 물을 담은 잔이 있었다. 물은 상했다. 사흘. 아니, 닷새 전의 물이었다.
루시앙은 방을 나왔다. 여관 주인과 마주쳤을 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주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손님이 많지 않은 모양이네."
"네."
"그 금발 손님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관 주인의 목이 움직였다.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루시앙은 그의 왼손을 봤다. 결혼반이 없었다. 오른손엔 있었다. 아내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는 손가락의 색깔로 알 수 있었다. 이 년쯤.
"딸이 있었나?"
주인의 눈동자가 진동했다.
"있었습니다."
과거형이었다.
루시앙은 돌아섰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마을에 여자가 없는 이유. 그리고 카렌이—라이엘이 왜 이곳에 머물렀는지.
마을의 반대편, 숲 가장자리에 작은 집이 있었다.
루시앙은 말을 타고 가지 않았다. 도보로 접근했다. 발소리를 죽였다. 십 년의 경험이 그의 발끝에 스며 있었다. 이제는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집의 뒤편에서 처음 본 것은 흙이었다. 새로 파낸 무덤의 흙.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루시앙은 경골을 깨물었다.
"저는 묘지를 파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앙은 천천히 돌아섰다.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손톱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한 번 뛰었다.
"카렌."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셨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것은 루시앙도 감지할 수 있었다. 피로. 절망. 그리고 무언가 더 낯선 것.
"여긴 왜?"
"여기는 계속 돌아오는 곳이었어요. 매번. 매번. 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그녀의 눈이 무덤들을 향했다.
"처음엔 모르고 왔어요. 그 다음엔 몸이 자동으로. 그 다음엔..." 그녀가 일시정지했다. "그 다음엔 기억했어요."
루시앙은 그녀를 관찰했다. 지난번 만남 이후로 무언가 변했다. 손톱의 금색도 더 짙었고, 눈동자도 다른 색이었다.
"황제는 당신을 원합니다."
"알아요."
너무 쉽게 대답했다.
"그럼 나를 따르시겠습니까?"
카렌은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진 유리소리 같은 것이었다.
"따라가면 뭐가 되나요? 황제의 밀사님?"
루시앙은 답하지 않았다.
"매번 같은 곳에서 시작해요.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매번 같은 방식으로 끝나요." 그녀의 금색 손톱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당신은 매번 같은 일을 하려고 왔어요. 그래서 나는 묘지를 팔 수밖에 없어요."
"무덤이?"
"기억들입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무덤이 아니라 더 정교한 것이 있었다. 각각의 무덤 위에는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같은 날짜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루시앙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추격하던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을 데려가야 합니다."
루시앙이 말했다.
카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금색의 눈물.
"매번 이 말을 들어요. 그리고 매번 따라가요. 그리고 매번—"
그녀가 중단했다.
마을이 떨렸다.
아니, 마을이 떨린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떨렸다. 루시앙은 다리를 굽혀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발은 더 이상 땅 위에 있지 않았다.
그곳은 모래였다.
"이제 시작해요."
카렌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또 다시."